|
|
정리 2009/02/26 01:12
우리는 구원의 안전함을 믿습니다. 영원성이라고 하죠.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브리서5:9
교회(교단)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근거 말씀으로 히브리서의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의 구절을 인용합니다. 즉, 속죄가 영원하니 구원도 영원하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성경구절은 영원한 구원을 증거하는 예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이 죄의 삯때문이고, 그 삯은 예수님께서 치루셨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즉,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때문이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영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이 영원해야 할까요? 아니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는 "믿음"이 영원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세상에 미친다는 것은 우리 대부분의 믿음입니다. 저역시 그렇고요. 그 속죄의 능력이 완전한 것은, 그것이 불완전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속죄의 영원성"은 하나님의 "영원성, 완전하심"에 의해 보장됩니다.
그런데 그 속죄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에겐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구원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영원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 사실을 믿는 우리의 "우리의 믿음"이 영원해야 할까요? "둘 다"가 정답 아닐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성경의 참된 의미는 다른 글에서 말해보겠습니다.) 속죄는 하나님의 편에서 이루신 일이며, 믿음은 "나", 우리의 편에서 가져야하는 조건입니다.
즉, 우리 편에서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라는 거시죠. 영원한 속죄에 대한 믿음은, 그 "믿음"의 내용물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영원성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영원성"이 아니라, 그 "속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의 영원성"임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행함의 문제는 다른 글을 통해 언급하겠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으신다면, 위에서 부터 다시 읽어 주세요.
즉, 속죄의 영원성을 말하는, 히브리서 9장 12절말씀은, 영원한 구원의 근거 말씀이 될수없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
오히려, 히브리서 5장 9절의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위의 구절은 사실 영원한 구원에 대한 직접적인 신약의 유일한 구절로 보입니다. 그런데 위의 말씀조차, "순종하는 모든 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쓴 글이 있는데 성경엔 "믿음 = 순종"의 등식이 성립하는 여러 구절들이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은 "영원한 속죄"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영원한 속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영원해야하지 않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을 한번 쯤 생각해 봄이 어떨까요?
이렇게 글을 쓰니, 영원한 구원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있지만, 저는 명백히 영원한 구원을 믿습니다. 이글은, 교회(대침)의 교리의 허술함을 알려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결론은 버킹검이다. 이런식이라면, 뭐 할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을 올바로 전하고 있는지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영원한 구원에 대한 믿음을 바로 전하고있지 못합니다.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87
정리 2008/10/06 23:5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며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아내들은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십시오.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됨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있듯이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모든 일에 순종하십시오
남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생명을 내어 주시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마치 아름답고 깨끗한 신부처럼 교회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개역한글 )
그러므로 남편들은 이와 같이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자기 몸을 아끼고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기 바랍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곧 자신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아끼고 돌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비밀이 놀랍고 크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당부하는데, 남편들은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쉬운성경 에베소서 5:20~33
이젠 무엇을 해야할까. 까페의 존재목적은 여전히 유지되고있나. 그 목적에 합당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나에 대한 생각을 잠시해봤습니다.
제 생각은 구체적으로 각 지역교회에서, 내가 속한 모임에서, 아니..내 삶속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할 때이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그분의 뜻을 행해야 할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을...어떻게 지혜롭게 해야 할지,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만 바랄 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과연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져서 찾아봤습니다.
그리고 나서 위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위의 말씀에서 교회는 가정과 다르지 않음을 알수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 혁명이 아니라, 양육, 교육에 가깝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대한예수교침례회가 교회가 아니라, 그 안의 형제자매들 한명 한명이 교회임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한번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교단을 바로 세워야 그속의 교회도 바로 서고, 양육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도인들과 부딛히고, 그분들의 반응을 본 결과로, 교단을 바로세우는 일의 어려움뿐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판단이 섭니다.
예.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기 원하시지, 교단을 세우기 원하시는 것이 아니니까요.
저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교회세우기)를 보다 비본질적인 문제(교단세우기)의 해결을 통해 해결해 보려하는 생각을 갖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엔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교회를 위해 주님이 죽어주셨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기록하고있습니다.
전 위의 말씀을 읽으면서, 제가 먼저 해야될 일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교회"로서의 "가정"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생각해보면 너무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방청소도 잘 안하고 컴퓨터로 대부분은 시간을 보내는 내 모습을 봅니다. 직업이 그런 것도 있지만, 제 생각에 좀 심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는 청소도 깨끗이 해야겠고, 함께 살고있는 가족에게도 더욱 잘해야 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부탁을 잘 들어주는 일. 배려하는 일. 모범을 보이는 일.. 무엇보다 진심으로 기도하고, 주님을 섬기듯 사랑하는 일....
내 가족에게 그것을 하지 못하면서 다른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내 가족을 섬기고, 내 가정을 바로 세우는 일. 무엇보다, 그 과정을 통해 내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일이 저의 첫번째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언젠가 가정예배를 시작하게 되고... 진정 아름다운 교회로서의 내 가정이 되기를 꿈꿔봅니다.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76
정리 2008/09/26 20:19
십일조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팔아 돈걷는 짓 말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필요한 돈을 걷는 일에 대해 이야기 해봅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 개역한글
너희 소유를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낡지 않는 지갑을 만들고, 하늘에 없어지지 않을 재물을 쌓아라. 거기는 도둑이 접근할 수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 쉬운성경
눅12:33~34
간단합니다. 돈을 많이 걷는 방법은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입니다. 마음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쓰는 것이 당연하고, 오히려 그것이 기쁨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경험하는 바 입니다.
교단은 돈을 걷는데 혈안되어 오히려 성도들의 마음을 잃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더욱 돈이 걷히지 않으니, 율법을 가져와서 형제자매들을 윽박지르는 한심한 짓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무지와 어리석음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저라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믿음, 신앙, 마음가짐 제일 중요한 것들을 다 제외하고, 그것은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하고, 그냥 방법만 말해보겠습니다.
아래의 방법은 마음을 얻는 것의 시작입니다. 생각나는대로 적어봅니다.
훨씬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고, 형제자매님들의 의견구해봅니다.
건축헌금에 대한 것은 제외하고 교회운영헌금에 대한 내용입니다.
대출을 받아 건축헌금을 하는 것을 결코 믿음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사랑의 빚외에는 결코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오히려 형제들이 빚을 지지 않도록 도와줘야 할 교회가 대출을 유도하는 것을 보면.....욱!
헌금의 본질은 다른데 있음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1. 십일조는 성경적인 의무가 아님을 확고히 천명한다. 제대로된 회개가 필요함.
십일조는 헌금의 합리적 기준이 될 수있을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신조로 삼는다.
2. 교회운영을 위해 필요한 재원의 마련을 위해 헌금이 필요함을 상기시킨다.
3. 십분의 일의 합리성을 교제한다.
(지금까지 걷힌 십일조의 계산을 통해 평균소득수준의 10분의 일을 책정하고, 그 소득보다 적은 사람은 상황에 맞춰 더 적게 참여하는 것이 합리적임을 충분히 교제한다. 빚이 있는 사람은 헌금대신, 오히려 최선을 다해 빚을 갚도록 유도, 함께 고민 - 사랑의 빚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않는 것이 성경적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도덕적 헤이 배제. 소득이 많은 사람은 더 내야함은 의도적으로 교제하지 않음, 형제에게 마음의 짐을 지우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는다.)
4. 용처를 분명히 정한다.
헌금의 배분과 관련된 문제로 용처를 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며, 그에 따라 고정된 비율로 헌금을 배분하는 것으로 한다.
이유 : 만약 성가대 운영에 4%의 예산이 씌인다면, 전체 헌금의 양에 따라 그 재정의 부족과 여유가 결정될 것이고, 성도들은 얼마의 헌금이 걷혔는지 자연스럽게 알수 있으며, 자신들이 속한 모임의 씌임에 부족, 잉여 여부를 통해 헌금의 부족분, 잉여분조차 가늠할 수 있어서 성도들의 헌금에 대한 동기 부여가 가능하다.(부족한 경우 강제없이 필요에 의해 부족함 없이 걷기 위한 방안)
전제 : 필요없는, 성도들의 마음의 공감 없는 용처를 정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용처를 정하기 위해 마음을 모으는 교제를 통해 하나가 되어가는 신앙을 체험하는 기회가 된다. 억지스러움의 철저한 배제
특별한 용처가 급히 생길 경우를 대비하여 일정 비율의 저축분 또한 정함.
5. 소득이 거의 없는 가정 중 일하고자 해도 일할수 없거나, 자신의 게으름이 가난의 원인이 아닌 경우 가난한 형제자매의 생활보장을 위해 교회에서 최선의 노력을 보여준다.
이유 : 돈을 내는 것은 마음이 먼저 가야 하고, 헌금이 가치있는 곳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알리기 위함.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성경적으로 가장 정당한 목적임.
또한 사회보장기능을 교회에서 일부 수용함으로써, 교회의 도덕성과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있는 등. 수많은 긍정적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
방안 : 1) 도움을 받는다고 여기는 가난한 성도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기위해, 가난한 자의 성경적 표현을 제대로 전달하려는 교단의 노력. 교회는 가족이기에, 가족의 도움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사실, 여유가 생기면 그때 더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된다는 상부상조의 미덕강조.
2) 구제의 대상이 되는 성도를 정하기 위해, 구제명단투입함, 메일계정등을 만들어, 어려운 성도 주변의 형제자매들이 익명으로 구제가 필요한 가정을 추천하도록 제의(성도들이 알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는 형제자매가 스스로 익명으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여지남김)
3) 비밀이 보장되도록 소수의 구제위원회를 구성 - 취합된 구제명단중 게으름이 가난의 원인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판단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 - 구제대상명단, 구제결정대상 철저한 비밀유지 -왼손이 하는일 오른 손이 모르도록.
4) 적극적인 자세로 구제사업을 추진 - 진실성이 있어야함.(가장중요)
- 전체헌금의 특정비율로 헌금배정. 헌금이 적게 걷힌 달은, 적은 구제액이 어려운 형제자매에게 돌아가게됨.
- 5번의 구제의 비율 늘려간다면 교회의 도덕성은 더욱 설득력있게 커져갈 것임. 이것이 가장 중요함. 다시한 번 강조하지만, 마음이 가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은 교회가 먼저 가난한 성도를 섬기는데서 시작해야함. 그리스도의 사업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에 기반한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마음이 있는 곳에 재물이 간다. 재물을 얻고 싶으면 마음을 얻어야한다는 간단 명료한 사실.
10분의 1은 평균적 소득수준의 합리적 기준을 제시한 것일뿐임. 부를 허락받은 사람의 의무를 강조하기 전에, 최고위 일부 목사님들의 청빈한 삶으로 모범을 보임이 절실함. - 윗물이 흐리면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될 가능성.
- 이웃에게 주면. 그러면 넘치도록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넘치도록 받은 것으로 또 주면, 더욱 넘치도록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 말입니다. - .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75
정리 2008/09/23 20:04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심으로 십자가에 순종하신 것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모범이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모습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기뻐하실까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임을 생각해봐야 할 것같습니다.
순종은 그 사랑에 기반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참으로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내게 고통이 될수도 있음에도, 그 고통조차 감수할 마음으로 순종을 하는 것은, 지금은 이해 할수없지만, 아니 살아서 이해 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서든, 죽어서든 하나님께서 내게 좋게 하기 위하심임을 절대적으로 믿기에,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기에, 내가 그분을 사랑하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때 과연 그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순종은, 그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사랑의 힘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순종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습니다. 절대적 순종은 절대적 사랑과 신뢰에 기반합니다.
순종은 그러한 사랑과 신뢰의 표현입니다.
저는 성경적 순종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릴 수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교회 몇몇 극소수 목사님들의 결정이라면, 교회의 뜻이 되고, 그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드리고 순종하시는 분들도, 그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러시는 것을 알기에, "성경적 순종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의 글들에 많이 논의해 봤던 내용입니다.
이너맨님의 현철한 글에도 있듯이, 요한계시록에 예수님의 뜻에 불순종했던 여러 교회들만 상기해 보더라도 결코 교회의 뜻에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을 알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교회의 뜻, 교회의 의지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는 결코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교회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도록,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고, 함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일부 목사님의 결정들,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결정들이 교회의 뜻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간절함으로 전도인사회라는 특정한 문화속에 매몰되어, 일반성도들과 단절되어 성도들의 신음과 소망을 바라보지 못하는 분들께 사랑으로 "함께 교제해보자, 함께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자"고 해야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이유입니다.
"아직 전도가 되니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다, 그러니 문제가 있더라도 덮고 순종해야한다. 전도라는 대의를 위해서? 아직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촛대는 옮기지 않았다. 그러니 목사님들의 결정에 의문을 품지 말자?"
이 말은 교회의 불순종이 극에 달하여 촛대를 옮기기 전까지 유효할 수있는 생각입니다. 즉, 촛대를 옮기기 전까지는 고치려는 노력보다 질서를 유지하는게 중요하다는 의미로 밖에 이해 되기 어렵습니다.
이것만큼 불순종의 말이 어디 있습니까? 촛대를 옮기기전에 회개하라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아닌가요?
촛대가 옮겨진 많은 교회들이 그와 같았습니다. 과연 그와 같았습니다.
순종은 오직 하나님께만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질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약 회사의 사장이라면, 내 부하직원이 내 말을 듣기를 원할 것이고, 만약 합당한 이유없이 지시를 거부한다면 해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만약 군대의 상관이라면 내 부하가 내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그를 군법에 의해 처결할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떠한 목적을 가진 집단에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체계적 질서가 있을 경우, 그 질서를 유지하기위한 권한 역시 주어지며, 그 집단은 그러한 질서와 규율에 의해 지탱이 됩니다.
그게 세상의 일반적인 집단입니다.
하지만 가정은 조금 다릅니다. 1차집단이라고 하던가요?
가정은 특정한 세상적 목적 보다는 애정과 신뢰의 관계가 더 중요하고, 이것은 어쩌면 가장 본질적인 목적입니다.
군대가 존재하는 이유도 나와 나의 가정을 지키기 위함이고, 회사에 나가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개인의 행복추구, 자아실현, 성취 그 모든 것을 지탱하는 것도 어쩌면 가정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얻기 위해 첫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군대이기도 하지만, 그 종됨과 군사됨은, 세상의 그것보다 더 우월한 완전한 신뢰와 사랑에 기반합니다.
군대와 회사가 군법과 경제적 위치로 우리 개인을 조정할 수 있겠지만, 사실 제대로된 군대와 제대로 된 회사는 법과 힘보다는 "신뢰"와 "애정"과 같은 가장 본질적인 관계 역시 두터운 곳입니다.
전우애를 이야기하고, 애사심을 이야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상관의 명령에 죽는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관의 명령에 참으로 목숨을 걸도록 하는 힘.
사장의 지시에 따르는 척하고, 대충 일을 마무리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처럼 책임감과 열정을 가지고 일에 미쳐살게 만드는 힘.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교회의 모습을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순종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빈도수는 갈수록 높아져 가고, 이 카페가 생긴 이후에는, 교회의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목사님중에 한분께서, 지속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 하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수있다라는 말씀까지 하고 계신 실정입니다.
그냥 비판하지 말고, 따라와라..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카페와 같이 교회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참 안타깝게도, 그분들은 교회에 대해 아쉬움이 있는 사람들은 "가라지"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비판없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결정이라도 따를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 것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생각이 없고, 현실에 안주해서, 별로 원하는게 없어서가 아니라, 징계가 두렵고, 권위에 눌려서가 아니라,
교회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있기 때문 일 것입니다. 지금 잠시의 의혹을 이겨 낼수 있는 이유는 바로 , 그 믿음과 사랑입니다.
순종을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에 교회를 넣어버리는, 전혀 다른 것임에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대리자 인양, 선지자 흉내를 내는 거짓 선지자들처럼, 말하는 일부 전도인들의 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대한 순종을 말하기 전에,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은 교회에 대한 성도들의 사랑과 믿음을 회복하는데 먼저 힘써야 할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없이 행하며 순종을 말하기전에, 스스로들 말씀하시듯 자신들의 눈의 들보를 먼저 봐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말하듯, 하나님의 자녀들을 비난하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허물은 없는지 살펴봐야 할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과거엔 그랬었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과거 교회는 나를 아들로 대해주었지만, 나도 어머니처럼 사랑했지만, 그래서 가정이었지만, 지금은 교회는 내가 직원이 되기를 원하며, 부하가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운영은 투명하지 못하고, 성도들 개개인의 신앙과, 행복보다는 눈에 보이는 확장에 더욱 관심이 많으며, 진정한 의미의 전도(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와 하나님 나라의 성취 보다는, 눈에 보이는 성과와 교회의 외형에만 전력합니다.
그러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아왔고, 애타게 생각해온 저는, 교회의 뜻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지키기에 너무 버거웠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하고, 기도하는 일들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노력을 교회의 방향과 배치된다고 생각하시며, 경계하시는 것에 슬펐습니다.
지금은, 목사님들의 결정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내 양심이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신다고 내 신앙이 말합니다. 난 반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함께 교제했고, 간절히 사랑했던 형제자매들이 내게 이단에 빠졌다고, 교만하다고, 거짓형제라고 저주하더도 슬퍼할 밖에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거절할수 없습니다.
지금은 밖에 있지만, 그 속에서 태어날, 그속에서 살아갈 많은 형제자매들을 기억하기에..그 기억이 날 붙잡습니다. 물리적으로 훼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않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확신되는 그 것을 이야기 할 것입니다.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님들, 전도사님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현실과 타협하고, 그 타협한 결과물로 형제자매들을 인도해 간다면, 진정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죄를 짓게될 것이고, 참으로 많은 사람을, 구덩이로, 실족케하는 죄를 짓게 될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신앙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적 제약들을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목사님들은 더욱 현실적임에 놀랐고 실망했습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가 그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 우상을 들여놓을때도 아마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적이다..라고, 하나님과 우상을 같이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 성전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갈 길, 자신들의 신앙을 굽히는게 아니라는, 자기합리화. 그렇게 배도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믿지도 않았고, 현실적 대안과 "합리"라는 껍데기를 쓴 "타협"을 가지고 모든 결정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몇몇 형제자매들이 무리한 건축으로 실족하고 있음에도 눈을 감고, 교회에서 이익사업을 하는 것에 대해 형제자매들이 갖는 마음의 슬픔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현실적 이익, 합리적 결과....우리는 보통 그런것을 "현실과의 타협" 혹은 "세상과의 타협"이라고 말합니다.
그분들이 오직 성결한 교회, 오직 사랑과 애정만으로 무장하고,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 그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모든것을 기쁘게 드려 세상을 이겨가는 교회를 꿈꾸지 않는 한, 교회는 현실적 타협속에 타락해 갈 것이고, 그 미래를 명백한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바뀔 것 같냐고.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냐고. 그런다고 바뀔것 같냐고. 교회의 질서만 흐트러뜨리고, 교회를 깨는 것일뿐이라고, 바뀔 수는 없는것이라고.
저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저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해야 겠습니다. 바꾸는게 하나님 뜻이라 믿는다고. 그래서 난 그렇게 하겠다고. 그리고 다른 분들도 그리해야한다고 외치겠다고. 현실적인 모든 조건을 뒤로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겠다고.
순종에 대해서, 목사님. 책임을 지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이 오늘 하시는 그 설교가 만약 하나님의 참된 뜻이 아니라면, 목사님은 교회에 순종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위치에 교회를 놓았던 목사님은, 하나님의 권위로 하나님의 뜻을 그릇 전한, 거짓선지자의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현실적 타협, 합리적 고려... 목사님이 고민하고 결정한 그것이,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 된다면, 그 만큼 무서운 일이 또 있을까요? 목사님들을 따르는 형제자매들에게나, 목사님에게나 말입니다.
저도 제가 비판하는 비판, 제가 잘못되었다 말하는 그 이야기..과연 옳은 것인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겠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하는 그것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 부디 바른 것이기 바랍니다.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73
정리 2008/09/15 11:38
이 글은 전도집회나 상담을 통해 꼭 듣게 되는 원죄에 대한 말씀이 제 역할(잠25:11)을 하기를 바람에서 올리는 것입니다.
전적인 저의 이해와 생각일 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죄에 대한 관념은 인간은 왜 모두 죄인일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원죄란 <'나는 왜 이렇게 더러운 죄를 짖는 걸까'>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의 의문에 대한 답이며,
<'꼭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에 가나? 죄 않짖고 착하게 살아도 가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속의 죄인된 본성을 바라보게 하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전도집회때엔 거의 항상 죄말씀 가운데 언급됩니다.
그런데 원죄의 관념은 어떤 사람들에겐 <'인간이 태어날때부터 죄인인 이유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서라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것도 아시고
그냥 두신 하나님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내가 죄를 짖는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나 하나님때문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실재로 교사로 봉사하는 가운데 어릴적부터 교회학교에서 자란 학생들 가운데 비슷한 생각을 하는 학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제가 생각하게 된 원인은, 듣는 사람의 마음에 <'죄'>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열망이 자리 잡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여기서 <'죄'로 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은 단순히 죄의 심판, 지옥이 무서워서 면죄를 받고 싶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너무 더러워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깨끗해지기를 원하는 마음,
자신이 죄를 짖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 열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한 열망이 있는 경우에는 자신의 죄인된 원인을 이해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는 것만이, 새나무가 되는 것만이 구원의 길임을 알게 될때,
주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죄는 즐겁고, 죄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음에도, 하나님의 실존을 알게되고, 지옥심판을 부정하기 어렵게 된 상태에서의 원죄에 대한 관념은,
그 죄짖는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는 핑계거리가 되는 경우가 있을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마음속에서 스스로의 죄를 고발하는 양심의 가책을 통해, 끊임없이 핑계를 대는 심리 가운데서도 그런한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 역시, 그 양심의 가책이
<죄로부터 벗어나고자<죄의 심판만이 아니라> 하는 열망>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원죄'에 대한 관념을 접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원죄에 대한 말씀이, 죄말씀의 <처음, 도입부> 부터 사용하는 것은 부정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듣는 이의 죄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그를 통해 양심의 찔림을 받는 괴로움, 절망 가운데, 단순히 '죄의 심판'만을 벗어나기를 원하는 욕구가 아니라
'죄의 권세' ,'죄 자체'로 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될때, 원죄의 말씀은 인간에게 완전한 절망이되고, 또한 반대로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길,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말씀일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전도집회에 있어서, 죄에 대한 신랄한 고발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고,
그것을 통해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조차 항상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일깨우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구구절절히, 장황하게 쓴 것에 대해 이해를 구합니다.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71
정리 2008/09/15 11:03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64
정리 2008/09/12 20:16
마치 이곳에서 무슨 파당을 만들어서 분열을 모색하는 자들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한 말씀 올려봅니다.
과거의 경험에 대한 학습 때문인가요? 일부 사람들이 대한예수교침례회 안에 새로운 신령한? 것을 들여와서 대한예수교침례회에 부정적의식을 심어 일부 형제자매들을 미혹해서 무리로 이탈하는 경험이 있어 왔던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아마 배상범 전 목사님 사건을 그런 식의 생각을 가지고 우려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이곳에서 이야기 되는 내용들이 배상범 전 목사님 쪽의 의견이 공감을 많이 얻고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그분을 추종하기라도 하고 있다고 보시나요?
도대체 뭘 그리 두려워 하십니까?
십수년을 대한예수교침례회안에 있으면서, 가장 활기찰 나이, 행복할 때를 그 안에서 다 보냈습니다.
친구도, 다 형제들 뿐, 세상의 친구한명 제대로 남아있지 않고, 이젠 예수쟁이 생활태도가 몸에 베어 세상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교회만을 유일한 행복으로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런 사람.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고 떠나고자 결심할때의 그 고민과 고통을 알기나 하는겁니까?
그 안에서 좋은 모습, 목사님말씀 잘듣고, 형제자매들이랑 즐겁게 어울리는게 좋은지 몰라서, 깨사모도 아니고
이런 인터넷 구석에서 어쭙짢은 글을 올린답시고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것은 참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다면, 벌써 말라버렸을 겁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형제자매들의 교회에대한 걱정과 올바른, 행복한 교회의 모습에 대한 꿈과 바램 조차, 마치 일부러 의혹을 부풀리고,
분열자들과 뜻을 맞춰 대한예수교침례회 성도 몇명을 베어물어 삼켜, 새로운 교단이라도 세울까봐서 우려하시는 것이라면 부디 마음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는 ...교단을 만들고, 교회당을 짓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에 속한게 아닙니다.
무엇의 눈에는 무엇만 보인다는 옛말이 떠오를 뿐입니다.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59
정리 2008/09/12 20:14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한 것을 내세워 모세를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하고만 말씀하셨나? 여호와께서 우리하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단 말이냐?”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습니다. 모세는 매우 겸손했습니다. 모세는 땅 위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셋 모두 당장 회막으로 나오너라.” 그래서 그들은 회막으로 갔습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내려오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회막 입구에 서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자, 두 사람 모두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너희 가운데 예언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보여 주고, 꿈으로 그에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 종 모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모든 백성을 충성스럽게 보살피고 있다. 나는 그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말하고, 숨은 뜻으로 말하지 않고 분명히 말하노라. 그는 나 여호와의 모습까지 보는데 어찌하여 너희는 아무 두려움도 없이, 내 종 모세를 비방하느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크게 노하시고 떠나가셨습니다. - 쉬운성경-
위의 성경과 같이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과 아론을 불러 책망하시고 미리암의 경우 문둥병에 걸리게 되는 사건입니다.
위의 글을 볼때 미리암과 아론을 책망하신 이유는 명백해 보입니다.
모세는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그에게 보여주시거나, 꿈으로 그에게 말씀하시지만, 모세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말씀하시고, 비유나 상징으로 숨겨서 말씀하시는것이 아니라, 명백히 말씀하시는 유일한, 특별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대언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어떤 예언자 와도 다른 선지자였죠. 앞의 글들에서 보듯,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이해됩니다.
모세는 보통의 '예언자'와도 다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미리암은 의문을 제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런 두려움 없이 비방을 했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아론은 병에 걸리지 않고 미리암만 병에 걸린 것으로 볼때, 두 사람은 같은 의견을 가졌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태도는 다르지 않았을까생각해봅니다.
아마 두려움없이 비방한 사람은 미리암이었겠지요.
물론 성경에 기록이 없으니, 위의 글에서 보듯, 모세에게 구스여인을 취하도록 특별한 명령을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리암과 아론이 책망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을 두려움없이 비방한데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균형감있는 성경보기라고 생각합니다.
일반 목사나 전도사들이 위의 예를 들면서 자신들의 권위를 변호하는 짓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고, 하나님이 직접 숨김없이 자신들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하지 않는 한 인정될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정신병자' 혹은 '이단'이 나온 것이 거의 확실할 것입니다.
모세는 그 어떤 선지자와도 다른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예수님의 그림자)이었음을 생각해볼때, 자기가 모세정도로 특별하다고 여기는 자나 위 성경구절로 자신들의 권위를 변호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감히 모세와 자신을 같은 위치에 놓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히려, 모세와 자신들을 같은 위치에 놓았던, 미리암과 아론처럼, 요즘의 목사들은 같은 죄를 다른 방식(모세의 경우를 들어 자신들의 권위를 변호하는)으로 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57
정리 2008/09/12 20:14
십일조에 대한 의견의 정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라오는 글들을 보니, 다른 생각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시대의 교회가 십일조를 걷는 것은 범죄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이런 의견이 교단측에서 보면 가장 불순한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물질이 작은 것이기에 가장 작은 불순물정도
로 보셔야 할텐데, 아마, 보시기에 가장 불순한 생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난 정치하지 않으렵니다. 용서와 관용은 노력하겠지만, 타협은 없습니다. 사실은 사실, 거짓은 거짓일 뿐입니다.
십일조가 신약시대에 허락된바 없음은 아래의 많은 글들을 통해 정리된바 아닙니까?
혹시나 교회의 대적세력으로 낙인찍히기가 두려운 것일까요? 예. 그렇죠.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아닌것을
사실이라고 말할수없습니다. 십일조는 우리에게 의무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겨우 하나님이 십일조에 만족하실거라 생각하시나요? 십일조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표시라고요?
하나님이 표시하지 않으면 못알아보시는 둔감한 분이시랍니까? 하나님이 십일조 내나 안내나 살펴보시면서, 우리를 한달에 한번씩 시험하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웃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국가에서 조세를 걷기위해서는 법률이 필요합니다. 조세법률주의는 보편적인 가치로 자리잡은지 오래입니다.
왕이 세상을 통치하던 시절엔, 신의 권위를 입은 왕권으로 그것이 가능했죠.
하지만, 법률에 의해서든, 왕권에 의해서든, 돈을 걷는데는 그에따른 근거, 권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조세저항을
극복할 대의명분이 서는 것이죠.
교단은 교단을 유지와 성장에 필요한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성경'의 권위, '하나님'의 권위를 사용하고 있음을 스스로 확실히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걷을 권력을, 교단에 주었고, 그 의무를 성도들에게 지우신게 아니라면, 교단을 이끄시는 분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돈'을 도적질한 죄를 결코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걷어들였냐. 자발적으로 내지않냐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거짓말쟁이거나, 실재를 볼 눈이 없으신 것입니다.
거짓말쟁이는 아니시겠죠. 보세요. 아래 많은 글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기뻐하신다, 하지만, 십일조를 안하면 하나님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그러니 꼭해야한다. 하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즐겨서 내라"
이 더럽고 위선적인 사고 방식이 교단의 주요철학쯤 되지 않는지 가슴에 손을 얻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이런 설교를 듣고, 이런 문화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십일조가 강요가 되지 않고, 자의가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또한 생각해보세요. 아 있긴 있습니다.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인정받고 싶으신 것이라면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십일조를 걷어 들이십시요.
만약 그 확신이 잘못되었다면,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권위로 돈을 걷어들인 도둑질의 댓가를
또한 받을 것도 확실히 알아두십시요.
걷지말라 하지 않겠습니다.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히 알아두시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물론 "꼭 해야한다. 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는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의 완전한 의지로, 내가 참석하는 모임의 유지와 성장을 위해 일정액을 정기적으로 내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과연 교단는 그러합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교단(다른 기성교단을 포함)은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도둑"이라는 가르침을 철회한바 없고, 철회할 의사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틀리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철회할 용기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더욱 사랑하는 것은, 진리와 하나님, 사랑과 믿음이 아님을 행위로 드러내리라 생각합니다.
과연 교단이 십일조에 대한 견해를 철회하고, 투명한 회계를 통한 자발적 헌금으로 교단의 일을 해 나간다면, 내 믿음없음을 고백하겠습니다. 하지만, 솔찍히 전 믿음이 없습니다. 바램은 있지만, 믿음은 없습니다.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이것은 진리 입니다.
복음 전하는데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것이 성경의 정신입니다.
돈으로 성령의 능력을 사려한 어리석은 자를 성경에서 봅니다. 돈으로 살수없는 성령의 능력을, 돈이있어야 전한다는 사고방식의 더러움을 생각이나 하실수 있을까요?
돈이 필요합니다. 교단을 유지하는데 필요합니다. 이웃을, 형제를 돕는데 필요합니다.
인정하세요. 그리고 당당하게 헌금을 걷어들이세요. 십일조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더럽히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럽히지말고, 거짓권위로 죄를 짓지말고, 그냥 돈좀 필요하니 내어달라고 하세요. 잘쓰겠다하세요.
복음을 전하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을 더럽히지 마시고,
교단을 유지하는데 돈이 필요하다. 십일조가 성경에 기록된 의무는 아니지만, 그정도는 내줘라. 그래야
교회전기세도 내고 수도세도 내지 않냐? 라고 당당히 요구하세요.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모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정도 의무는 당연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부디 하나님의 권위를 등에 업고, 거짓을 전하며, 하나님의 복음의 가치와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더럽히지 말아주세요.
예수님이 제자를 보내시면서, 여벌의 옷도 전대도 허락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상기하세요.
당신이 믿음이 있는자 입니까?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데 돈이 필요하다 이야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돈 많은 형제자매님들, 십일조 하지마시고, 교회 헌금좀 많이 하세요. 십일조...째째하게 그것내고, 면죄부받은양
살지 마세요. 연봉 일억에 천만원내고 구천만원 자기뜻대로 좋은 자동차 좋은 집 누리는데 사용하면 잘했다 하실것 같다면 그리하세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받으세요.
십일조란, 없는 자에게 족쇄와 멍에요, 있는자에게 면죄부가 될뿐입니다.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56
정리 2008/09/12 20:12
사실 이 일들은 저와 제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왔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주신 것을 돌려 드린 것뿐입니다. - 쉬운성경 역대상 29:14
그러나 제가 누구기에, 제 백성들이 누구기에 이렇게 많은 것을 드릴 수 있게 하셨습니까?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나온 것이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드린 것일 뿐입니다 - 우리말성경 역대상 29:14
다윗이 모여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 솔로몬을 선택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아직 젊고, 배울 것도 다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전은 인간을 위한 집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집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의 성전 짓는 일을 준비했습니다. 금으로 만들 물건을 위해 금을 준비했고, 은으로 만들 물건을 위해 은을 준비했습니다. 구리로 만들 물건을 위해 구리를 준비했으며, 쇠로 만들 물건을 위해 쇠를 준비했습니다. 또 나무로 만들 물건을 위해 나무도 준비했습니다. 박아 끼울 마노와 옥도 준비했고, 색깔이 있는 돌과 여러 가지 보석과 대리석도 많이 준비했습니다. 나는 이미 이 모든 것을 성전을 위해 바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성전 짓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가지고 있던 은과 금도 바쳤습니다.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순은 칠천 달란트로, 이것을 가지고 성전의 벽을 입힐 것입니다. 또한 온갖 금기구와 은기구도 만들 것입니다. 기술자들이 그 금과 은을 가지고 성전에서 쓸 물건을 만들 것입니다. 오늘 기쁜 마음으로 여호와께 예물을 바칠 사람은 없습니까?” 그러자 각 가문의 지도자와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와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의 일을 맡아 하는 지도자들이 값진 것을 바쳤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바친 것은 금 오천 달란트와 금 만 다릭과 은 만 달란트,구리 만 팔천 달란트, 쇠 십만 달란트입니다. 보물이 있는 사람도 여호와의 성전 창고에 바쳤습니다. 게르손 가문의 여히엘이 보물을 관리했습니다. 지도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여호와께 예물을 바쳤습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기쁜 마음으로 여호와께 바쳤으므로, 백성도 기뻐했고, 다윗도 기뻐했습니다. 다윗이 모여 있는 모든 백성 앞에서 여호와를 찬양했습니다. “여호와여,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를 영원토록 찬양합니다. - 쉬운성경 역대상 29:1~10
......................................................................................................................................................................
짧지 않은 말씀이지만 함께 묵상해봤으면 합니다.
말을 시작하기 전에 건축이 성전을 세우는 일이 결코 아님을 확인합니다. 요즘의 건축은 오히려 하나님의 집인,우리의 교제와 모임을 허물고 있다고 믿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절대권력자인 선지자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사람의 집이 아닌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이기에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지기를 원했습니다. (어쩌면 교회당을 세우는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는 분들이 교회당을 좋은 재료, 비싼 재료를 사용해서 화려하게 짓고싶어하는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봅니다. 교회당을 짓는 일이 성전을 짓는 일이 아니기에, 오히려 주변을 돌아보며 형제자매들을 살피는데 마음을 쓰고 재물을 쓰는 것이 하나님의 집, 교제를 세우는데 더중요함을 모르기에 하는 "삽질"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탓할수없는 열정이라고 여겨지기도합니다.)
다윗은 성전을 짓기 위해, 세금을 늘렸고, 백성들에게 각자 얼마씩 낼것인지 작정을 하고 문서로 적어내도록 하여 그에 따라 예산을 편성했습니다. 또한, 작정내용을 채우지 못한것을 대비하여, 만약 모자른다면 자신이 대출을 알아봐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아니죠. 아닙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행동으로, 진심으로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설득의 과정입니다. 자신이 말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맡은 소유를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그리고 말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먼저 이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는 화려한 궁에 살면서 하나님은 장막에 거하신다는 사실이 항상 그의 마음에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하고자 하는 사업의 정당성, 올바름에 대한 한마음을 이끌어 냈던 것입니다. 그 말은, 그 진실성은, 이미 힘에 지나도록 드린 그의 행동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금을 무겁게 했고, 백성들은 마지 못해 다윗이 보기에 창피하지 않을 만큼 적절히 돈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좀 힘들겠지만, 할일을 했다는 안도감에 한숨돌렸습니다.
아니죠. 아닙니다. 다윗도, 백성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물었습니다.오늘 기쁜 마음으로 여호와께 예물을 바칠 사람은 없습니까?”
그 이후의 모든 일은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했고, 진정 하나님에 대한 사랑, 감사, 섬김...바로 헌신의 마음을 담아 기쁜 마음으로, 한결같이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드렸고, 백성도, 다윗도 기뻐했다는 사실입니다. 헌금이 기쁨일 수있다는 사실...우리가 과연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요? 많은 헌금을 할수 있어서 너무 기뻐서..한결같이 함께 찬양 할수 있을까요?
현재의 방법으로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모을 만한 정당성이 없고, 정당성이 없는 목적에 정당하지 못한 설교와 방법으로, 자의가 아닌 심리적 강제로 일을 해나가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기쁨으로 예물을 드릴수있었던 이유는, 절대권력자 다윗으로서의 강제가 아니라, 선지자 다윗의 겸손함과 진실함 이었습니다.
다윗이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감사과 헌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어떠 했을지 생각해 볼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잘은 모르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생각합니다.
전도인들은 형제자매들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분들의 설교와 교단을 이끄는 방식은, 결코 다윗과 다릅니다.
우리도 즐겨 드릴수 있습니다. 그 즐겨드림의 결과가 자신들의 기대한 돈보다 적을 것이 우려되어 하는 모든 지침은 믿음이 없는 자들의 그것과 같습니다.
할말이 너무 많지만 글이 너무 길어져서 읽는 분이 피곤하실것같아 이만줄여봅니다. 읽으시는 형제자매님들의 온전하신 판단이 그 모든 공백을 매우고도 남으리라 확신합니다.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55
정리 2008/09/12 20:06
제가 경험하고 확신하는 바를 이야기한 것이 같은 경험과 생각을 해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어려움이 있을거란 것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구원에 대한 지식에 대해 몰라도 복음을 알면 구원을 받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고 말하니 더욱 혼란스러워 하시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런 혼란은 정확한 개념을 스스로 정리하며 믿지않는 대부분의 경우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잘 알지도 못하지만, 가급적 신학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풀어서 쓰려고 하니 문장도 더 길어지는 것 같고요.
설명해보면,
구원은 실체적인 것입니다. 실재로 존재하는 사건이죠. 생명의 탄생과 생명을 생각해보면, 생명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고, 생명의 탄생은 분명 있는 사건입니다.
구원도 그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명을 온전히 이해하고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자체가 살아있음에도, 생명의 여러 모습을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살아있고,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지식을 몰라도 구원을 얻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기적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구원도 온전히 이해할 수없다는 사실을 이야기 한 것이고, 그러한 구원의 현상, 구원에 대해 완전한 지식이 없더라도,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그의 사랑을 긍정하고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구원은 누구에게나 이루어 지는 사건 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지식이라고 하니까 복음과 혼동을 하시는 듯합니다.
복음은 구원에 대한 지식의 핵심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조차 우리가 단순히 이야기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닙니다.
대한예수교침례회는 복음을 너무 단순화 시켜서 하나님의 참된 의도조차 생각지 않는 기독교인이 생겨날 여지를 너무 많이 허락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공로로 믿는자가 천국에 간다는 말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일부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이전 글들에 써 놓았습니다.
http://cafe.naver.com/jbchlove/82 복음과 구원
http://cafe.naver.com/jbchlove/163 3. 복음전파라는 아름다운 이름아래 -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음전파의 방법
http://cafe.naver.com/jbchlove/98 2. 복음전파라는 아름다운 이름아래 - 우리의 복음에 대한 이해는 성경적인가?
http://cafe.naver.com/jbchlove/96 1. 복음전파라는 아름다운 이름아래 - 들어가며
그리고 구원은 또다른 이야기 입니다. 구원은 복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건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체험하지, 구원을 분석하고 연구해서 복음을 알게 되고 구원받는게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지식을 잘 몰라도, 복음을 믿을 수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전 글들을 읽어보신다면 이해가 더 쉬울듯합니다.
제가 최근 글들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구원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그 신비로운 현상, 은혜로운 경험을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못하며, 그것으로 인해, 삶가운데 이루어지는 참된 구원조차 간과하며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제글은 정제된 글이 아닙니다. 오류도 있고, 부족한 점도 있겠죠.
하지만, 부디 읽어주실때, 이 형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구원이 그처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 실체이기에, 그처럼 다양한 구원에 대한 견해가있는 것이고, 자신은 구원을 체험했음에도, 잘못된 구원관을 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루터든, 캘빈이든, 알미니아누스든, 다 구원의 일부의 모습을 설명하고, 그만한 지혜가 있지만, 그 누구도 구원을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해 내지는 못했다고 압니다.
그들의 견해중 하나를 선택하고 서로 다투고 싸울 것이 아니라, 그 모두를 공부해 보고, 내가 성경을 통해, 내 삶을통해 구원을 더욱 알아가는 자세가 좋을 것같습니다.
구원은, 과거 한번 체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체험하는 것이기에, 그 체험이 없는 구원에 대한 지식은 진정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생각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이며,내가 그 안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인정하고, 그 구원을 체험하면서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이야기 할수 있습니다. 구원파는 구원에 대해 처음은 너무도 강렬히 경험하지만, 그 이후엔 너무도 앝게 체험해간다고요. 삶가운데의 구원(생활의 구원이라고 해야지 정겨울까요. 저는 그 단어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것에는 사실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못합니다.
전도, 그것도 좁은 의미(제글을 읽어보시면 나오는)의 전도에만 집착하고 있을 뿐입니다.
카페가 너무 지식적으로 흐를 것을 걱정하시는 것을 압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재 구원은 체험되어야 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자체이기도 합니다. 그 구원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한 노력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단순합니다. 우리 모두 누구나 아는 그것이죠. 그러나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신바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구원을 계속 경험해나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절름발이 신앙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부디 제글이 혼란을 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이전 글들이 이해하기 쉬우실듯도 합니다.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50
정리 2008/09/09 21:15
구원 만큼 중요한 이슈는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동일함에도 구원에 대한 의견은 다양합니다.
구원에 대해 쉽게 말해보면, 하나님에게서 단절된 상태에서 태어난 사람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그 완전하신 자비로 외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심판받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다는 사실과,
그것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선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자녀가 되며, 하나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 사람을 영원히 지키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또한,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 하나님의 편에 영원히 서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리스도인 이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명확한 내용이지만, 여기에는 한가지 중요한 의문이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한 사람이 그 후에,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될 가능성(지옥)은 있는가?"
이것은 구원의 완결성을 강조하는 입장(완전한 은혜에 의한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에서는, 구원은 취소될 수 있느냐?의 문제이며,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믿음 후의 타락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실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일 뿐이지만, 결국 같은 현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구원은 취소 될수 없다. 혹은 믿음 후 타락(지옥에 감)이 가능하다
구원의 완결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구원은 취소 될수 없습니다.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과거에 믿음을 가졌더라도, 현재나, 미래에 믿음을 버리면(배도하면) 지옥에 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구원의 완결성(영원성)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요10:27~2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8~39
구원의 현재성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6:4~6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0:32~33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24:10~13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48
정리 2008/07/17 10:48
"문제는 문제삼는 사람에게만 문제다." 교회에서 생활하다보면 이런 말을 한번쯤을 들어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 하기 전에, 이말의 뜻을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문제 [問題]
[명사] 1 해답을 요구하는 물음. 2 논쟁, 논의, 연구 따위의 대상이 되는 것. 3 해결하기 어렵거나 난처한 대상. 또는 그런 일. 4 귀찮은 일이나 말썽. 5 어떤 사물과 관련되는 일.
問題意識[문제의식] [명사]문제점을 찾아서 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태도.
우선 위에서 문제 라는 단어의 뜻중 " 문제?가 되는 문장^^에서 사용되는 문제는 아마 4번쯤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말은 교회생활중에서 어떤 잘못된점이라고 느끼는 것에 대해 이야기, 혹은 비판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의도로 사용되는 말로 여겨집니다.
문제는 문제삼는 사람에게만 문제란 말의 무서운 점은
첫째는, 밑도 끝도 없이 모든 "문제의식"자체를 공격하는 생각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런 말을 통해, 문제의식을 갖는 모든 사람들을 공격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의식"이란 그 전제가 가치평가입니다. 문제점을 알게되는 과정이죠.
사람은 가치평가를 하는 존재입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말이죠. 지옥 보다 천국이 좋다. 이것도 좋다 나쁘다의 가치평가가 들어갑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루종일, 평생 가치평가를 하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휴지를 버리는 사람을 보면, 저러면 안될텐데, 아이의 손을 잡고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을 보면, 저것도 안될텐데 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고, 내 면전앞에서 노상방뇨를 하거나 침을 뱉는 다면, 조금은 불쾌해지는게 사람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사람이니까, 교회는 그만큼 소중하니까 당연히 더 많은 가치평가를 하게됩니다.
관심은 결국 가치평가와 비례하게되죠.
교회에서 "가치평가", "판단"을 가장많이 하는 부서가 어디일까요? 그곳은 "전도인실"입니다.
그분들은 판단하고, 가치평가 하도록 의무지워진 분들입니다.(물론 현재의 시스템 내에서죠. 전 전도인들께서는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시고, 행정적인 일과 시시비비를 따지는 일등은 신실하신 집사님들께 모두 맡겨야 한다고 믿습니다. 말씀묵상과 전도에만 전념하신다면, 날로 깊어져가는 말씀을 듣는 모두가 행복할 것같습니다.) 그분들은 성도의 한마디, 한가지 행동을 모두 가치평가하십니다. 그래서 이건 이래서는 안된다, 저건 이렇게 해야된다 생각하시고, 열정이 많으신 분일수록 더욱많이 가치평가를 하십니다.
그분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문제 삼는 분들입니다.
전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치평가는 "선택"의 핵심 기준이 됩니다. 가치평가를 통해, 선택을 하게 되죠. 제가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사는 몇가지 생각중 하나가 "사랑은 선택이다"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선택을 하는 것은 "구원"과도 직결되는 것이라서 저는 최고의 가치를 둡니다.
아마 "문제는 문제삼는 사람에게만 문제다"라는 말의 주요 의도는, 사소한 내용에 대해 "시시비비"를 따지는 말라는 것일 것입니다.
분란을 싫어하는 단체주의적 발상에서는 유용하겠지만, 그것은 올바른 생각과 개성까지 압살합니다.
빈대잡으려다 초가삼간태우는 격이죠.
빈대는 분란이고, 초가삼간은 성도들 개개인의 생각과 창의, 문제의식입니다.
이 문장 자체가 "문제의식", "가치평가", "판단"을 담고 있는 것이죠.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문제의식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문제의식"자체를 공격하는 생각은 도저히 용납할수없습니다.
또한, 이런 말을 통해 교회안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고치고자하는 모든 노력들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진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은 모든 것을 판단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판받지 않으려는 태도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저도 교회내에서 분란이 일어나고, 문제점이 드러나면, 괴롭습니다. 하지만, 병이 낫기 위한 고통이라면 감내해야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감기에 항암제를 쓰는, 즉 필요이상으로 문제점만 부각시키는 잘못이 있을 수 있음은 압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 형제의 편협함이 드러날 것이고 그것을 잡아줄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 잘못들을 권면해줌을 통해 교제가 되고, 그 개인의 신앙은 성장하는 것이니)
모든 비판하는 자세를 비난하는 것은 우습지않나요? 아니 무섭지 않나요?
저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을 문제삼기 전에, 자신을 먼저 문제삼고, 그리고나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도와줘라" 이게 성경의 정신이라 믿습니다.
남에 눈의 티끌을 보기전에 자신의 눈의 들보를 먼저 보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다른 사람의 눈의 티끌, 얼굴에 뭍은 콧물도 닦아 주는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닥치고 따라와라, 생각은 내가 한다" 난 이런건 교회를 이끄는 자세도, 신앙의 자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문제삼지 않으면 문제는 사라지는 것, 없는 것일까요? 물론 자신의 세계에서는 문제가 없겠죠. 자신은 이미 생각을 버렸으니. 생각을 할줄알고 생각이 있는 또다른 사람들이 문제가 되는 것도 생각이 없겠죠. 그리곤 그런 사람에게 또 말하겠죠.
"문제는 문제를 삼는 사람에게만 문제다"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42
정리 2008/05/21 22:48
==========================================================
(유태인 학살)홀로코스트 박물관 "수용소 사진"옆에 독일인 목사의 말
"아무도 나서지 않을때 어떤 결과가 일어 나는지"
그들이 노조를 공격했지만,
나는 노동운동가가 아니기 때문에 침묵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했지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침묵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태인들을 공격했지만,
나는 유태인이 아니기 때문에 침묵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나를 공격했을때,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30
정리 2008/02/26 18:10
말씀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보통 간증되고 이야기되는 부분은 "양"적인 부분인 것같다. 1독, 2독, 3독...등 다독..
다독이나 통독뿐 아닌 정독 역시 중요하지만 정독에 있어서 말씀묵상의 깊이는 사실 측정할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잘 이야기 되지 않는 것이리라... 물론 말씀으로 형제자매 앞에서 설할 기회가 있는 경우에는 그 깊이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겠지만...이것또한 그 아는 것과 말, 글로 표현하는 능력이 사람마다 다름을 생각하면 도저히 잴수없는 부분이 된다. 사소한 내용도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으니까..
어쨌든 보통, 다독, 통독의 장점은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성경을 봄을 통해 성경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성경의 부분적 내용을 전체의 뜻과 어울리게 읽을수 있는 즉, 앞뒤가 맞지않는 해석..ㅡㅡ;을 하는 우를 피할수 있는 기본 전제가 된다는 의미에서 처음 성경을 접하는 경우엔 오히려 정독보다는 다독, 통독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통독으로 보통 4~5독을 한 경우라면 정독은 꼭 필요한 것같다. 구체적인 말씀의 의미를 새기는 것...성경연구라는 의미에서의 정독은 너무 중요한것.
뭐..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지만...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다른 부분의 그냥 두더라도 꼭 유의해야할 점에 한가지 이야기 하고 싶어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관한 이야기다. 보통 전도집회나 일요말씀가운데 등에서 주로 많이 접하게 되는 말씀등,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익숙한 말씀들의 경우 오히려 그 해석에 있어서... 우리가운데 이야기되어지는 해당 말씀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 때문에..그 본래의 의미와 뜻을 보지 못하거나, 오해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여러번 느끼게 된다.
즉, 이해하기 쉽게 말씀한 경우나, 허용되는 의역, 가능한 영해등을 한 경우가 여러번 말씀을 통해 이야기된 경우, 그러한 해석만 접하고 거기서 생각을 멈춤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해석이 정상적인 내용을 감추는 색안경이 되어버려 전체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이해가 되어버리는 경우다.
말이 복잡한데 예를 하나 들면 간단할것같다.
누가복음 23장 31절 말씀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위의 말씀의 경우는 푸른 나무는 유대인, 마른 나무는 이방인, 이라는 해석이 조금은 고정되어 있는데.. 실제 말씀의 문맥을 앞뒤로 읽어보고 기존에 형성된 관념없이 읽어보면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마른 나무는 유대인을 포함한..보통 인간, 죄인들을 말하는 것을 알수있다.
물론 이게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고 다 아는 사실이고 어느 목사님께서 이야기 해주신것 같기도한데...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중에는...그랬었나..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예는 생각외로 여러곳 된다.
이런 경우는 생각외로 중요하다. 말씀을 오해하고 있는 경우, 혹 말씀을 전하시는 분외의 다른 경로를 통해 자신이 오해를 벗었을 경우 기존의 해석방법으로 말씀을 전하신 분에 대한 불신이나, 오해가 생길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은 알게 모르게 교제와 교회,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 무조건적인 신뢰조차 상하게 한다.
하고싶은 말은....셩경말씀을 읽는데 있어서 영적인 의미, 상징의 개인적 해석등을 하기 앞서...그 해당 구절의 기본적인,, 문자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고.. 그것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성경자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구절을 처음 대하는 듯 접근하는 자세...겸손과 통한다고 생각하는데...그런 자세가 필요한 것같다 는것..
말씀을 읽는 것이 좋지 않은 의미에서 습관화 된 듯하고..심상한 일일행사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는 것은...그런 마음 자세의 부족이 아닐까.
그러한 말씀앞에 무릎꿇음없는 말그대로 생각없는 태도에서...무슨 지혜를 깨달을수있을까..하는 반성을 해봤다.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8
정리 2008/02/26 15:31
1. 성경을 읽는 목적이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 그 목적은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함이다.
2. 처음 성경을 읽을 때는 세상을 있게한 창조자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인지 알고 싶어서 였고, 그것을 인정하게 된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얻고자 하거나, 죄책감에 괴로울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위로를 받고 싶어서 였다.
3.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정리하기엔,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알고, 그분께 말을 걸고, 삶가운데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 그리고 그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4.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기에, 그분이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나를 항상 주목하시는 하나님을 나 또한 주목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한다.
5. 스스로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과 생각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지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얻고자 했던 내 생각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식을 갖지못하며 사는 중에, 혼돈의 삶을 벗어나고자 했던 잘못된 시도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성경에서 삶의 기준을 발견하려 하는 시도는 자신만의 율법을 새우려는 시도가 된다. 신앙은 이러한 시도에서 하나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구체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이가 정해놓은 법을 따르는 먼 삶이 아니라, 친구의 마음을 느끼며, 그 친구를 위해 그 생각을 따르는 가까운 삶이다.
6.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마음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못느끼고 있는 현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고, 이것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7. 성경은 실재로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성경속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 너무도 많이 담겨있지만, 그것을 아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8. 성경엔 많은 사건들이 기록되어있고,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기록이다. 성경 속의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행적과 마음에 대한 기록과 사람의 기록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다.
9. 인간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다.
10.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다.
11. 많은 인간의 책을 읽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다.
12. 하나님의 책을 읽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다.
13. 성경 읽는 유익은 하나님과 사람을, 세상을 알아가는데 있다.
14. 비슷비슷한 말 일수 있지만, 성경을 읽는 태도로서, 어떠한 삶의 기준을 발견하려는데 집중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읽는것을 지양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무엇을 알기 원하시는지, 지금 내게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가 중요하지, 내가 어떤것을 알고 싶은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안다고 생각하고 어디로 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그 방향을 알고자 하는 시도는, 만약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 틀릴 경우, 결코 답을 얻을 수없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에 서있는지 아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알려주시고 싶은 그것이 내가 알고 싶은 것이 되는 것이 좋은 길이다. 성경을 읽을 때 집중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려는, 하나님의 생각을 알려는 호기심, 하나님 중심의 삶의 자세다.
15. 성경속엔 하나님의 말씀(뜻, 마음)이 씌여있기에, 거룩하다. 성경은 초월적인 하나님이 인간의 눈높이에서 인간에게 말씀하신 인간의 언어다.
16. 따라서, 인간의 언어의 한계로 인해, 성경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을 표현할 수 없다. 다만, 인간의 언어로 계시된 하나님을 인간인 내가 인간의 수준에서 이해 할 뿐이다. 초월적인 하나님을 알았다 자만하지 말자. 하나님은 내 이성으로 이해될수 없는 분이다.
17. 세상은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흔적이다. 성경은 그 흔적의 정수다.
18. 성경을 통해서, 세상을 통해서, 나를 통해서, 너를 통해서, 우주의 모든것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19.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겐 삶의 기준, 법을 뛰어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자유다. 성경속에서 법을 찾으려는 것은 그 자유를 버리게 되는 우를 범 할 수있다.
20. 하나님안의 자유는 절대 선의 자유다. 성경속에서 자유를 읽는다.
21. 성경을 논리적으로 읽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성경을 초논리적으로 읽는 것 역시 중요하다.
22. 성경은 먼저 씌인 그대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다. 몰상식은 수치다.
23. 교리의 편견을 버려라.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 이상의 존재, 존재 이상의 존재이다.
24. 정통이 있어서 이단이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씌인대로 읽었다면 그냥 인정해도 무방하다. 성경전체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다면 입을 다물어라. 최소한 확실치 않음을 밝혀라. 어떠한 견해도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자유롭게 이해하고 생각하라.
25. 내가 발견한 하나님은 아직까지는 거룩, 사랑 뿐이다. 과연 끝이 없다는 것은 사실일까.
26.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은 선포되어야 한다.
27. 하나님은 모순 이상의 존재이다.
29. 그래서 하나님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적으로도 느껴지지만, 사실 둘 다 틀린 것이다.
30. 하나님은 오직 자신에 의해 계시될 뿐이다.
31. 내가 진정 알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로고스를 알아가는 것이다.
32. 로고스는 하나님의 나타내심이다.
33.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costoflove.tistory.com/trackback/7
|